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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심리

(모비딕)의 에이해브 선장을 통해 본 광기와 집착의 심리학

허먼 멜빌의 고전 (모비딕)은 거대한 흰 고래 ‘모비딕’을 쫓는 에이해브 선장의 집요한 복수극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바다 모험이 아니라, 에이해브라는 인물의 광기(madness)와 집착(obsession)이 어떻게 인간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심리학적으로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본 글에서는 에이해브 선장의 심리를 강박적 집착, 편집증적 사고, 파라노이드 성향,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 현대 심리학 관점에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모비딕』의 에이해브 선장을 통해 본 광기와 집착의 심리학

 

1. 에이해브와 모비딕: 고래가 아닌 ‘증오의 상징’

에이해브 선장이 쫓는 것은 단순한 고래가 아니다. 그는 과거 모비딕에게 다리를 잃고 난 후, 흰 고래를 운명, 악, 신의 도전으로 여긴다. 모비딕은 그의 내면에 잠재된 두려움, 무력감, 존재의 혼란을 투사한 상징물이며, 그의 복수는 단순한 보복이 아닌 존재적 분노와 두려움의 발산이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대상 투사(object projection) 현상과 유사하다. 에이해브는 자신의 내면의 고통을 외부 존재(모비딕)에게 투사하고, 이를 제거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혼란을 정당화하려 한다.

 

 

2.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복수심의 병리화

에이해브는 다리를 잃은 외상적 경험 이후, 오직 복수라는 단일 감정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전형적인 반응 중 하나로, 트라우마 이후 특정 기억이나 사건에 과도하게 몰입하여 현실과의 연결을 잃는 증상을 보인다.

그는 선원들과의 관계, 항해의 목적, 생존의 가치를 모두 무시한 채, 자신의 내적 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고래를 파괴하려는 광적인 행동에 빠진다. 이는 외상 경험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을 경우 발생하는 병리적 집착의 대표적 사례다.

 

 

3. 강박과 집착: 모든 삶의 에너지를 왜곡시키는 힘

에이해브의 사고와 행동은 모두 하나의 목표—모비딕의 제거—에 집약되어 있다. 그는 고래를 향한 분노 외에는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으며, 자신의 존재 자체를 복수에 결합시킨다. 이처럼 특정 대상에 강하게 고착된 사고와 감정은 강박적 집착(obsessive fixation)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강박적 사고는 자율적 판단을 마비시키며, 논리와 이성보다 충동과 감정이 앞선 상태에서 반복 행동을 유도한다. 에이해브는 점점 현실 판단력을 상실하며, 고래를 죽이기 위해 선원들과의 신뢰, 항해의 목적, 자신의 생명까지 내던진다. 이는 자기 파괴적 집착의 심리학적 실례다.

 

 

4. 편집증적 사고: 음모, 의미 부여, 그리고 피해의식

에이해브는 모비딕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마치 악의 신적 존재처럼 자신을 겨냥해 공격했다고 믿는다. 이는 편집증(paranoia)의 전형적인 사고 패턴으로, 무작위적 사건에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고,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왜곡된 신념을 갖는 것이다.

그는 모비딕을 ‘세계가 자신에게 던진 질문’으로 여긴다. 이런 왜곡된 인식은 타인의 충고를 무시하게 만들고, 모든 비판을 음모로 간주하며,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야기한다. 에이해브는 결국 이런 편집증적 신념 속에서 외롭게 고립되고, 집단을 광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5. 선원들과의 관계 단절: 공감의 결핍과 자기중심성

에이해브는 선장의 위치에 있지만, 선원들의 안전이나 삶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오직 자신의 목적에만 집중하며, 주변 인물들의 감정이나 필요를 철저히 무시한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공감 결핍(lack of empathy)과 자기중심성(egocentrism)의 징후로 해석된다.

정신역동적 관점에서 볼 때, 에이해브는 자신의 외상적 상처를 타인과 나누지 못하고 내면에 고립시켜, 점점 더 자기 내부 세계에 몰입한 병리적 리더가 된다. 이로 인해 그는 타인과의 정서적 연결을 차단하고, 공동체 전체를 자기 파괴로 끌어들이는 위험한 존재가 된다.

 

 

6. 광기와 합리성 사이의 경계: 에이해브는 미친 것인가?

에이해브는 외형상 논리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리더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가진 명확한 목표, 단호한 말투, 사람을 이끄는 힘은 사실 광기와 강박이 합쳐진 병리적 통제에 가깝다.

심리학적으로 그는 이성과 광기 사이의 불안정한 경계에 서 있으며, 그의 언행은 내면의 혼란을 억누르기 위한 보상적 과잉 통제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외면은 냉철하지만, 내면은 무너진 인물일수록 현실 판단력이 상실되고, 위험한 선택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마치며: 에이해브의 비극이 보여주는 인간 심리의 깊이

(모비딕)의 에이해브는 단지 복수를 꿈꾸는 선장이 아니다. 그는 상처받은 자아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른 채, 자신의 분노와 공포를 외부 대상(모비딕)에게 투사하고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지키려는 심리적 투쟁의 화신이다.

그의 비극은 단지 고래를 쫓다 죽은 것이 아니라, 상처와 트라우마를 직면하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광기와 집착에 사로잡혀 자기와 공동체를 파괴하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에이해브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고통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 고통은 정말 바깥에 있는가, 아니면 당신 안에 있는가?”

(모비딕)은 거대한 바다와 고래의 이야기이자, 한 인간 내면의 고요하지만 격렬한 파괴의 심리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