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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심리

(페스트)가 보여주는 집단 트라우마와 재난심리학적 접근 및 현대사회와의 비교

(페스트)가 보여주는 집단 트라우마와 재난심리학적 접근 및 현대사회와의 비교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단순한 전염병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집단적으로 어떤 심리적 변화를 겪는지를 보여주는 철학적·심리학적 기록이다. 오랑이라는 도시를 덮친 전염병의 이야기는 집단 트라우마와 재난심리학의 핵심 주제를 드러내며, 오늘날 코로나19와 같은 현대 사회의 재난 경험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1. (페스트)의 배경과 줄거리

알제리의 작은 도시 오랑에서 쥐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하면서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퍼진다. 도시는 봉쇄되고, 사람들은 죽음과 공포에 직면한다. 의사 리외와 몇몇 인물들은 끝까지 싸우지만, 대부분의 시민은 절망과 무력감에 빠진다.

이 과정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심리적 충격을 보여준다. 카뮈는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부조리와, 재난 상황 속 인간 본성을 탐구했다.

 

 

2. 집단 트라우마의 심리학적 정의

집단 트라우마(Collective Trauma)란 공동체 전체가 극단적 사건으로 인해 경험하는 심리적 상처를 의미한다. 이는 개인적 트라우마와 달리, 사회 구조와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공유된 충격: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가 동일한 위협과 상실을 경험
  • 불안과 무력감: 개인의 통제력이 무너지고, 집단적 불안이 만연
  • 사회적 유대의 변화: 공동체 결속이 강화되거나, 불신과 갈등이 심화

(페스트)는 이러한 집단 트라우마의 단계적 진행을 소설적 형상으로 보여준다.

 

 

3. (페스트) 속 집단 트라우마의 전개

1) 부정(Denial)의 단계

초기 시민들은 전염병의 존재를 부정한다. "곧 지나갈 것이다"라는 심리적 방어기제는 재난 심리학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불안을 줄이기 위한 무의식적 회피이지만, 결과적으로 대응을 늦추어 피해를 키운다.

2) 공포와 패닉(Fear & Panic)

죽음이 현실화되자 사람들은 극심한 공포와 혼란에 빠진다. 이때 발생하는 집단 패닉은 사회 질서를 위협하고, 개인은 이기적 행동이나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3) 무력감과 절망(Helplessness)

도시 봉쇄가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점차 무력감에 젖는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과 유사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경험은 개인의 의지를 꺾고, 우울과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4) 적응과 연대(Adaptation & Solidarity)

리외, 타루, 랑베르 같은 인물들은 절망 속에서도 연대와 희망을 선택한다. 이는 집단 트라우마의 회복 단계로, 인간이 절망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려는 심리적 회복탄력성을 보여준다.

 

 

4. 재난심리학적 접근으로 본 (페스트)

재난심리학은 전염병, 자연재해, 전쟁 등 극단적 사건 속 인간 심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페스트)는 재난심리학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요소들을 드러낸다.

1) 불확실성과 불안

정체불명의 질병은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을 낳는다. 이는 현대 심리학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오랑 시민들이 겪은 불안은 코로나19 초기의 불안과 유사하다.

2) 고립과 소통의 단절

도시 봉쇄는 사회적 관계를 차단하고, 가족과 친구의 단절은 상실감과 우울을 심화한다. 이는 오늘날 ‘사회적 거리두기’와 동일한 심리적 결과를 낳았다.

3) 의미 찾기와 회복

재난 상황에서 인간은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의미를 찾는다. 리외가 끝까지 환자를 돌보는 이유는 바로 “인간으로서의 책임”이라는 의미 부여 때문이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과도 연결된다.

 

 

5. 주요 인물들의 심리학적 상징

리외

합리적이고 헌신적인 의사로, 집단 트라우마 속 회복탄력성을 상징한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의미와 책임을 선택한다.

타루

연대와 이타적 행동의 상징. 그는 개인적 불행을 넘어 공동체적 책임을 감당한다. 이는 재난심리학에서 강조하는 공동체 지지(social support)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랑베르

처음에는 탈출만을 원했지만, 결국 연대에 참여한다. 이는 자기중심적 대응에서 공동체적 대응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시민 전체

부정, 공포, 무력감, 적응으로 이어지는 집단 심리의 흐름을 대변한다.

 

 

6. (페스트)와 현대사회: 코로나19와의 비교

카뮈의 소설은 20세기 중반에 쓰였지만, 21세기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더욱 강렬한 현실감을 준다.

공통점

  • 초기의 부정: 코로나19 초기, 많은 사회에서 위험성을 축소하려는 태도가 나타났다.
  • 공포와 패닉: 사재기, 사회적 불신, 음모론 등으로 공포가 확산되었다.
  • 고립과 소외: 봉쇄와 거리두기는 인간관계 단절과 외로움을 심화시켰다.
  • 연대와 회복: 의료진의 헌신, 온라인 공동체의 연대는 희망을 상징했다.

차이점

  • 현대 사회는 정보 기술로 소통이 가능했지만, 동시에 가짜 뉴스와 혐오를 증폭시켰다.
  • 과학적 의료 체계가 있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와 불평등으로 대응의 차이가 나타났다.

 

7. 집단 트라우마가 남긴 심리학적 교훈

 

(페스트)와 현대 팬데믹 경험은 다음과 같은 심리학적 교훈을 준다.

  • 재난 속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능력이 심리적 건강의 핵심이다.
  • 사회적 연결과 연대가 개인의 회복탄력성을 높인다.
  • 의미와 책임을 찾는 태도가 절망을 이겨내는 힘이 된다.
  • 정보와 진실의 중요성: 잘못된 정보는 공포와 불안을 증폭시킨다.

 

결론: (페스트)의 현재적 의미

 

카뮈의 (페스트)는 단순한 전염병 소설이 아니라, 집단 트라우마와 재난 속 인간 심리의 기록이다. 오랑의 시민들이 겪은 고통과 심리적 변화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극단적 상황에서 어떻게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지를 본다.

오늘날 코로나19와 같은 현대 사회의 재난은 (페스트)가 던진 질문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당신은 절망 속에서 어떤 의미를 선택할 것인가?”
“고립과 불안 속에서도 연대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재난과 인간 본성의 심리학적 교훈을 전하는 불멸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