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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심리

[홍학의 자리]에 나타난 기억 왜곡과 정체성 혼란 분석

 

1. 작품 개요 및 줄거리 요약

정해연 작가의 [홍학의 자리](2021)는 한국 심리스릴러 장르의 강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강렬한 첫 장면에서 교사 김준후가 제자 채다현의 시신을 호수에 유기하는 장면이 등장하며, 독자는 곧바로 사건의 한가운데로 끌려갑니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독자는 다현이라는 인물의 과거와 정체성을 조금씩 알아가게 됩니다. 다현은 학내 괴롭힘과 외부의 편견 속에서 살아왔고, 주변 인물들의 기억과 발언 속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재현됩니다. 결정적으로, 다현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는 반전은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던 독자의 기억과 해석마저 뒤집어 버립니다.

작품은 이처럼 사람의 정체성은 기억 위에 세워지지만, 그 기억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는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독자는 다현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각 인물이 왜 그를 특정한 방식으로 기억했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2. 심리학적 개념 및 작품 분석

 1) 기억은 재생이 아니라 ‘재구성’이다

심리학에서는 기억을 흔히 ‘저장된 파일’로 비유하지만, 실제로 기억은 사건의 순간 그대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서와 신념, 사회적 맥락에 따라 재구성됩니다.

  • 재구성 기억(Reconstructive Memory): 바틀릿(Frederic Bartlett)의 연구에서 처음 제시된 개념으로, 사람들은 원본 정보를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해석을 중심으로 기억을 재구성한다고 설명합니다.
    [홍학의 자리] 속 인물들은 각자 다현을 다른 방식으로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은 피해자로, 또 다른 사람은 도발적인 존재로 기억하죠. 이는 사실의 차이가 아니라 해석의 차이입니다.

 2) 자기정당화와 선택적 망각

김준후는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사건과 관련된 세부 사항을 희미하게 만들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기억을 수정합니다. 이는 인지부조화 이론(Leon Festinger)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기준과 실제 행동이 불일치할 때, 사람은 행동을 바꾸기보다 기억과 해석을 바꿉니다.
선택적 망각(Selective Forgetting)은 트라우마 상황뿐 아니라 도덕적 위반 상황에서도 나타나며, 이는 기억 왜곡의 중요한 기제입니다.

 3) 사회적 고정관념과 기억 필터

다현이 여성으로 인식되었던 이유는, 이름과 외모라는 제한된 단서에 사회적 고정관념이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의 스키마 이론(Schema Theory)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가진 지식 구조(스키마)에 맞춰 새로운 정보를 해석하고 기억합니다.
즉, ‘다현’이라는 이름과 특정 외모가 여성 스키마를 자극했고, 이후의 모든 정보는 그 스키마에 맞춰 왜곡되었습니다. 독자 역시 소설의 중반까지 이 스키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4) 정체성 혼란의 발달심리학적 측면

에릭슨(Erik Erikson)의 심리사회적 발달 단계 이론에서, 청소년기는 ‘정체성 대 역할 혼미(Identity vs. Role Confusion)’ 단계입니다. 다현은 외부의 지속적인 오인과 괴롭힘 속에서 자신의 성별·자아상을 확립하지 못하고, 타인이 규정한 정체성을 받아들이거나 반발하는 사이에서 혼란을 겪습니다.
정체성 혼란은 자기효능감(self-efficacy) 저하, 우울, 사회적 고립과 깊게 연관되며, 이는 작품 속 다현의 대인관계와 행동 패턴에 반영됩니다.

 5) 집단 기억과 왜곡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는 집단 기억(Collective Memory) 개념을 통해, 개인의 기억이 사회적 집단과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홍학의 자리]에서 학교라는 집단은 다현에 대한 왜곡된 기억을 공유하고 강화합니다. 이는 피해자의 이미지를 특정 방향으로 고정시키며, 개인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바꾸는 데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6) 거짓 기억의 형성과 유지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의 실험들은 질문 방식이나 주변인의 암시만으로도 완전히 거짓된 기억이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소설 속에서 다현의 성별과 성격에 대한 ‘증언’들은 서로 충돌하지만,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기억을 확신합니다. 이는 거짓 기억이 얼마나 쉽게 뿌리내리는지를 잘 보여주는 문학적 사례입니다.

 7) 정체성 회복의 불가능성

작품이 던지는 가장 냉혹한 질문은, “왜곡된 기억 위에 세워진 정체성은 회복될 수 있는가?”입니다. 다현은 이미 사망했기에, 스스로를 재정의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이는 기억과 정체성이 ‘타인에 의해’ 영원히 고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에게 큰 불편감을 줍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사후의 인물은 자신의 내러티브를 수정할 기회를 갖지 못하며, 사회적 기억 속 이미지로만 남게 됩니다.

 

 

3. 심리학 연구 사례

  1. 재구성 기억 연구 – Bartlett (1932)
    원주민 설화를 재이야기하게 한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맥락에 맞게 이야기를 변형시켰습니다. 이는 소설 속 인물들이 각자 문화적·사회적 배경에 맞춰 다현을 기억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2. 거짓 기억 실험 – Loftus & Palmer (1974)
    자동차 충돌 영상을 본 후, 질문에서 ‘충돌(hit)’과 ‘박살냄(smashed)’이라는 단어만 바꿨더니, 후자의 집단이 더 심각한 사고로 기억했습니다. 이는 언어적 프레이밍이 기억을 얼마나 왜곡하는지 보여줍니다.
  3. 정체성 혼란 연구 – Marcia의 정체성 상태 모델
    청소년기의 정체성 발달을 네 단계(성취, 유예, 유실, 혼란)로 나누었으며, 다현은 ‘정체성 혼란’ 상태로, 탐색과 확립 모두 미완의 상태에서 외부 압력으로 정의되었습니다.

 

 

 

4. 결론 및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

[홍학의 자리]는 미스터리의 틀을 빌려,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취약하고, 정체성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줍니다. 기억은 절대적인 기록이 아니며, 매 순간 새롭게 ‘쓰이는’ 이야기입니다. 정체성 또한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타인의 기억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재구성됩니다. 이 작품은 독자에게 묻습니다.

  • 당신이 기억하는 ‘나’는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가?
  • 혹은 타인이 기억하는 ‘당신’은 얼마나 진실한가?
  • 그 기억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재정의할 것인가?

[홍학의 자리]는 불완전한 기억과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차갑지만 깊이 있는 시선으로 비춥니다. 그리고 이 불편한 질문은 독자의 마음에 오래 남아, 스스로의 기억과 정체성을 다시 돌아보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