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비극적 역사 현장을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거나 피해자의 삶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날의 폭력과 상실이 개인의 내면과 공동체의 관계망 속에서 어떻게 지속적으로 살아남아 심리적·사회적 영향을 미치는지를 집요하게 탐구한다. 특히 소설은 트라우마 문학의 특징인 파편화된 서사, 다양한 화자의 시선, 침묵과 반복의 리듬을 통해 집단 트라우마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주인공 동호와 그 주변 인물들이 겪는 상실감, 죄책감, 무력감은 단순한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집단 기억 속에서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와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년이 온다]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마주하고 있는 기억의 정치, 그리고 애도의 윤리에 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붙잡는 행위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향한 도덕적 책임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1. 집단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1-1. 개념 정의
집단 트라우마(Collective Trauma)는 전쟁, 학살, 재난과 같이 특정 집단이 동시다발적으로 겪은 심리적 상처를 의미한다. 이는 개인의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세대를 넘어 기억과 정체성 형성에 지속적인 흔적을 남긴다.
1-2. [소년이 온다]와 집단 트라우마
작품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광주라는 도시와 그 시민 전체의 영혼에 각인된 집단적 상흔이다. 주인공 동호와 주변 인물들이 겪는 고통, 상실, 그리고 침묵은 개인적인 트라우마와 동시에 공동체적 상실감을 반영한다.
2. 기억의 파편화와 반복
2-1. 트라우마와 비선형 서사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사건을 온전히 ‘이야기’로 구성하기 어렵다. 기억은 파편처럼 흩어지고, 때로는 특정 장면이 반복 재생되듯 떠오른다. [소년이 온다]는 이런 심리적 특성을 반영해, 비선형적 구조로 서사를 전개한다. 시간 순서가 뒤섞이고, 동일한 장면이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 반복된다.
2-2. 반복되는 이미지와 심리
소년 동호가 시신이 가득한 체육관을 오가며 관을 나르는 장면은 여러 차례 묘사된다. “서른 개의 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반복을 통해 독자에게 기억의 각인 효과를 준다. 이는 실제 트라우마 경험자가 겪는 플래시백(flashback) 현상과 유사하다.
3. 침묵과 증언 사이
3-1. 말할 수 없는 고통
트라우마는 종종 ‘말할 수 없음’으로 나타난다. 사건의 참혹함이 언어의 한계를 넘어설 때, 피해자는 침묵하거나 단절된 문장으로 기억을 표현한다. 작품 속 생존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그날의 일을 말하지 못하며, 심리적 고립을 겪는다.
3-2. 증언의 필요성
그러나 트라우마 심리학은 말하기와 증언이 치유 과정에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소년이 온다]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들이 조심스럽게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은, 기억을 현재로 소환하는 작업이 곧 애도의 출발점임을 시사한다.
4. 애도의 심리학
4-1. 애도의 단계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는 애도를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의 단계로 설명했다.
[소년이 온다] 속 인물들은 각기 다른 애도의 궤적을 보인다. 동호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오랫동안 부정하지만, 끝내 그를 기억하는 활동에 참여하며 수용의 단계에 이른다.
4-2. 개인 애도와 집단 애도
개인의 애도는 시간과 함께 진전될 수 있지만, 집단 트라우마의 경우 사회적 인정과 기억의 공유가 필수적이다. 광주의 비극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행위는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집단 치유의 핵심 절차이다.
5. 세대 간 전승되는 트라우마
5-1. 2세대 트라우마
트라우마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도 전해질 수 있다. 생존자의 자녀나 후손은 부모의 침묵과 불안, 반복되는 회상을 통해 간접적 트라우마를 물려받는다.
[소년이 온다]는 사건 이후의 광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그날의 그림자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5-2. 기억의 지속성과 책임
작품이 제기하는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어떻게 이 기억을 지킬 것인가?” 트라우마를 잊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역사의 공백을 만드는 일이다.
6. 공동체 치유와 문학의 역할
문학은 트라우마의 기록자이자 치유자다. [소년이 온다]는 단지 비극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의 장을 마련한다. 독자는 작품을 통해 과거를 목격하고, 그 고통을 공유하며, 집단적 애도의 과정에 참여한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 고통을 기억하는 것은 치유의 일부다.
- 증언과 기록은 집단 트라우마를 미래 세대와 공유하게 한다.
- 애도는 끝나지 않지만, 기억 속에서 새로운 주체가 탄생한다.
결론: 기억과 애도, 그리고 인간의 회복력
[소년이 온다]는 한 개인의 성장 서사도, 단순한 역사소설도 아니다. 이 작품은 집단 트라우마가 개인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결속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일종의 심리·사회 보고서에 가깝다. 동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날을 목격하거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는 시간이 흐른다고 자연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말해지고 기록되며, 애도의 과정을 거쳐야만 치유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한강은 작품을 통해 고통의 기억을 부정하거나 잊는 대신, 그것을 직면하고 공동체적 차원에서 수용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단지 광주라는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폭력과 상실을 겪은 모든 공동체가 공유해야 할 교훈이다. [소년이 온다]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명확하다. 기억하지 않는 것은 곧 다시 반복되는 것을 허락하는 일이며, 애도하지 않는 것은 공동체를 잃는 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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