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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심리

[살인자의 기억법] 속 치매와 기억 상실의 심리학

[살인자의 기억법] 속 치매와 기억 상실의 심리학

 

1. 작품 개요 및 줄거리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치매에 걸린 은퇴한 연쇄살인범 ‘김병수’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독특한 심리 스릴러입니다.
병수는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을 ‘정의’라 믿으며, 나름의 윤리 규칙 속에서 살인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는 노년기에 접어들며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고, 기억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우연히 마주친 젊은 남자 ‘태주’가 연쇄살인범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의 기억이 계속 왜곡되고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현실과 망상이 뒤섞이는 가운데, 병수는 자신의 마지막 사명을 완수하려 합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의 시선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지, 그가 보는 ‘현실’이 진짜인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2. 치매와 기억 상실의 심리학

2-1. 치매의 정의와 특징

치매(Dementia)는 기억력, 사고력, 판단력, 언어 능력 등 인지 기능이 전반적으로 저하되는 증후군입니다. 알츠하이머병이 대표적 원인이며, 환자는 최근 기억부터 점차 잃어갑니다.

병수의 경우, 단기 기억 상실과 시간·장소 인지 혼란이 뚜렷합니다. 그는 현재 벌어지는 사건과 과거의 기억을 구분하지 못하며, 이로 인해 이야기 자체가 불확실해집니다.

2-2. 기억 상실의 유형

심리학에서 기억 상실(Amnesia)은 크게 전향성 기억상실(anterograde amnesia)과 역행성 기억상실(retrograde amnesia)로 나뉩니다.

  • 전향성: 새로운 정보를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지 못함
  • 역행성: 과거의 특정 시점 이전의 기억을 상실

병수는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전향성 기억상실 때문에, 태주와의 대치 상황에서 방금 있었던 일조차 잊어버립니다.

2-3. 기억 왜곡과 구성 기억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의 연구에 따르면, 기억은 완벽하게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왜곡될 수 있습니다. 병수의 경우 치매로 인해 이 왜곡이 극대화되어, 사실과 상상이 섞인 ‘허위 기억(False memory)’이 빈번히 발생합니다.

 

 

3. 병수의 심리 구조 분석

3-1. 자기 합리화

병수는 과거 살인을 ‘악을 처단하는 정의로운 행동’으로 합리화합니다. 이는 인지 부조화 이론에 따른 전형적인 자기 합리화로, 자신의 행동과 도덕적 신념 간의 불일치를 줄이기 위한 심리 기제입니다.

3-2. 통제 상실과 불안

치매가 진행되면서 병수는 자신의 인지 기능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통제 상실 감각(Loss of control)은 강한 불안을 유발하고, 그는 이를 억누르기 위해 ‘마지막 임무’라는 강박적 목표에 집착합니다.

3-3.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

문학적으로 병수는 전형적인 신뢰할 수 없는 화자입니다. 그의 기억 왜곡과 착각은 독자로 하여금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치매 환자의 현실 혼동 증상을 사실적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4. 치매와 범죄 심리

4-1. 도덕적 판단의 변화

치매는 전두엽 기능 저하로 이어져 도덕적 판단 능력에 영향을 줍니다. 병수는 여전히 ‘살인은 나쁘다’는 일반적 도덕 규범을 인지하지만, ‘나의 살인은 예외’라는 왜곡된 신념을 유지합니다. 이는 병리적 인지 왜곡의 사례입니다.

4-2. 공격성과 충동성

일부 연구에 따르면, 치매 환자는 뇌 손상 부위에 따라 충동 조절이 어려워지고, 공격적 행동을 보일 수 있습니다. 병수의 과거 폭력성은 이러한 신경학적 요인과 성격적 특성이 결합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4-3. 범죄 기억의 불확실성

병수의 회상은 현재 사건과 과거 범죄가 뒤섞여 있어, 그가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법적 판단에서도 치매 환자의 증언 신뢰성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5. 가족 관계와 정체성

5-1. 딸과의 관계

병수는 딸 은희를 지키려는 강한 보호 본능을 보입니다. 치매 환자에게서 가족은 정체성 유지의 마지막 연결고리 역할을 합니다. 은희는 병수의 혼란 속에서도 그를 현실로 연결하는 ‘앵커(anchor)’ 역할을 합니다.

5-2. 정체성 붕괴

에릭슨(Erikson)의 심리사회 발달 이론에서 노년기의 과제는 통합 vs. 절망입니다. 병수는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단절되면서 자기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정체성 붕괴를 겪습니다.

 

 

6. 기억 상실의 문학적 기능

6-1. 서사의 불확실성

작품은 병수의 기억 왜곡을 활용하여, 독자가 진실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는 스릴러 장르에서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6-2. 독자와의 심리 게임

독자는 병수의 시선을 통해 이야기를 보지만, 동시에 그의 증언을 의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심리적 긴장은 독자의 몰입을 극대화합니다.

6-3. 현실과 환상의 경계

병수의 기억 상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어, 치매 환자가 경험하는 ‘인지적 카오스’를 문학적으로 체험하게 합니다.

 

 

7. 심리학적 회복 가능성

7-1. 치매의 비가역성

현재 의학적으로 알츠하이머성 치매는 완치가 불가능하며, 진행을 늦추는 약물·인지 훈련이 주된 치료법입니다. 병수의 상태는 이미 심각하여 회복 가능성이 낮습니다.

7-2. 의미 있는 결말

병수의 마지막 행동은 독자에 따라 ‘구원’ 혹은 ‘착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는 마지막 시도일 수 있습니다.

 

 

8. 결론 및 성찰

[살인자의 기억법]은 치매 환자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기억 상실이 인간의 정체성과 도덕 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심리학적으로 탐구한 작품입니다.
병수의 죄와 기억, 그리고 혼란스러운 시선은 독자로 하여금 진실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듭니다.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 기억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여전히 같은 사람일까?
  • 죄를 잊은 가해자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질 때, 인간의 도덕성은 어디에 기반할 수 있는가?

결국, 기억은 단순한 정보 저장이 아니라 자아의 뿌리이며, 기억 상실은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심리적 재난입니다. 병수의 혼란과 불안은 치매 환자와 가족이 직면하는 잔혹한 현실을 상징하며, 동시에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취약함을 보여줍니다.